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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찰떡궁합이 별건가요
작성자 관리자 [2026-09-05 08:3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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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떡궁합이 별건가요
  /오인순

 


 

 


늦은 오후. 여름 햇살 한 조각을 베어 씹는다. 청양고추 매운맛처럼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다. 푹푹 찌는 불볕더위에 몸은 축 늘어지고 입맛이 달아난다.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여름을 식힐 마땅한 반찬이 없다. 뜨거운 불 앞에 서는 일조차 망설여진다. 그렇다고 식사를 거를 수는 없는 일이다. 창문 활짝 열어젖히고 텃밭의 초록이라도 불러들이면 입맛이 돌아올까.

 

이글거리는 태양을 이고 있는 텃밭에 발을 담갔다. 한더위를 어떻게 지냈는가. 내 새끼들, 고추 가지, 오이 ᆢ. 지난밤 별빛 아래서 떠들던 웃음은 사라지고 없다. 잎사귀가 뜨거운 열기에 지친 듯 떨군 고개가 안쓰럽다. '소낙비'라도, 눈이 빨개지도록 애타게 기다리며 혁혁거린다. "힘들지, 뜨거워야 열매를 맺는 거야" 하고 속삭여 본다.
텃밭 담장 위에 핀 호박꽂이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웃는다. 호박 넝쿨이 담장을 타고 오르며 꽃 잔치를 벌인다. 한낮의 열기도 두렵지 않은 듯 칠월의 태양을 품고 환하게 피었다. '호박꽃도 꽂이냐'라며 꽃 대접을 해주지 않아도 여름은 호박꽃의 계절이다. 푸대접받는 꽃과는 달리 큰 열매가 달리니, 보기만 해도 그저 시골의 후덕한 아주머니처럼 포근하다. 그래서 나는 호박꽃을 좋아한다. 무더위의 고통을 물리치듯 하늘 향해 트럼펫 연주하는 그 모습이 아름답다. '포용, 관대함' 이란 꽃말처럼 소박한 외모에서 넉넉함이 묻어난다. 

 

나의 삶도 이랫으면 좋겠다. 그래서일까. 호박 몇 덩이가 대청 마루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으면 가난의 시간도 쓸고 지나갔다 초록빛 호박잎이 그리움을 품은 듯 바람에 출렁인다. 호박넝쿨은 마당의 장독대 옆이나 담벼락을 타고 오르던 익숙한 옛 풍경이었다. 노란 호박꽃이 피면 호박잎쌈이 여름 식탁에 오르기를 기다리곤 했다. 그뿐인가. 호박 속살에 박힌 호박씨, 좌르르 쏟아지면 난간에 앉아 씨앗을 까먹곤 했다. 깨물 때 '딱' 하고 깨지는 그 소리는 건강을 바라는 비손이었다.

 

호박잎 위로 오래된 기억이 자박자박 걸어온다. 어린 시절의 한여름 밥상은 호박잎에 매달렸다. 부엌 아궁이는 뜨겁고 매콤했다. 어머니 얼굴에서 땀방울이 솥단지 밥물처럼 쉼 없이 흘러내렸다. 보리밥 솥에 호박잎을 찌고. 된장에 고추와 마늘, 멸치를 넣어 쌈장을 만들고 나면 부엌은 어머니의 땀 냄새로 물들었다. 마루에 앉아 보리밥과 쌈장을 호박잎에 올려 여름을 돌돌 말아 한입 먹으면 구수한 향이 입안에 퍼졌다. 입안에서 퍼지는 향과 단맛은 그 어떤 음식보다 진하고 따스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촉촉하게 밴 향기가 나를 사로잡았다. 코를 박고 그 향에 깊숙이 빠져들면 작열하는 여름을 날려버리듯 시원하기만 했다. 담장을 타고 오르내리는 부드러운 호박잎 몇 장을 따서 주방에 섰다. 호박 잎의 푸르른 시간을 들여다본다. 흔들리며 지나온 발자국을 다독이듯 호박 잎 한 장씩 줄기와 겉껍질의 거친 면을 벗긴다. 오늘은 가스레인지 불 켜기가 싫어 간편한 방법을 택한다. 전자레인지를 돌리거나 찜기에서 찌는 것도 아니다. 흐르는 물에 가볍게 씻어 양푼에 놓고 끓는 물을 붓는다. 물기를 꾹 짜내니 호박잎이 뙤약볕에 견딘 가슴을 풀어 헤친다. 뜨거움을 견딘 고통의 시간은 지나고 한없이 짙푸른 잎이 부드럽다.


여름이면 나도 어머니처럼 강된장을 끓이고. 볶음 고추장을 만든다. 넉넉하게 만들어 한 김 식힌 뒤 냉장고에 넣어두면 반찬 없어도 여름 밥상을 해결할 수 있다. 어떤 음식에도 어울리는 강된장 만드는 법은 소박하고 어렵지 않다. 먼저 재료를 준비하고 손질한다 양파와 버섯, 애호박을 잘게 썰고, 마늘은 다지고 대파와 고추를 송송 썬다. 주방에 익숙해진 남편이 냉장고에서 두부를 꺼내는 나를 보더니 두부를 건네받는다. "어떻게 하면 돼?" "칼등으로 으깨." 듣자마자 칼을 쥐고 노련한 듯 두부를 으깬다. 그의 춤추는 도마질 소리가 주방 혈관을 탄다. 두부 육신에 새긴 무늬가 뭉툭한 칼등에 으스러지며 무너진다. 사랑은 때로는 거칠고, 아프다고 말했는가. 언제가 "못 할 게 뭐 있나?"라며 내밸던 당당한 목소리가 도마 위를 지난다.온 몸에 새긴 애증의 기억을 어루만지며 노후의 연가가 주방에 펼쳐진다. 


먼저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다진 마늘과 멸치를 볶아 향을 낸다. 알리신 마늘 향이 갯내 나는 멸치의 냄새를 감싸며 풍미를 더한다.감칠맛이 가까이에서 훅 느껴진다. 가슴 깊은 곳에 스며들었던 잊은 기억까지 불러낸다. 기억 속에 스민 향이 핏줄 따라 조용히 흐른다. 불현듯 어머니 손맛의 은은한 향기가 살아나 내게로 온다. 나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은은한 향기로 남을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멀기만 하다.

 

여러 가지 볶은 채소와 볶은 멸치를 한데 섞는다. 멸치의 감칠맛에 양파의 은은한 단맛과 표고버섯의 쫄깃한 식감이 어우러진다. 그 맛은 도드라지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기억 속의 여름 풍경으로 우러난다. 사람 사는 세상도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에 된장과 고추장을 풀어 자작하게 볶는다. 강된장의 핵심은 된장과 고추장의 비율이다. 된장의 짠맛 세기에 따라 조절하면 되지만 4:1로 하면 큰 무리가 없지 않나 싶다. 으깬 두부와 대파 청양고추를 넣어 한소끔 더 볶는다. 곁에서 지켜보는 남편의 얼굴 위로 숱하게 격었던 쓰디쓴 시간이 겹친다. 주름진 얼굴이 애잔하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넣는다. 고소하면서 구수한 강된장, 이보다 깊고 진득한 맛이 어디 있으랴. 세월의 숙성된 맛으로 편안하게 다가온다. 숟가락 듬뿍 떠먹어도 짜지 않으니 다른 반찬이 없어도 밥 한 그릇을 든든하게 비워낼 수 있지 않으랴.

 

여름 텃밭 수놓던 내 새끼들 다 불러내어 배가 터지도록 먹이고 싶다. 미리 만든 강된장과 데친 호박잎으로 차리니 여름 성찬이다. 남편과 함께 오붓하게 호박잎쌈에 취해본다. 호박잎에 밥 한 숟갈과 강된장을 올려 쌈을 싼다. 호박 잎의 싱그러운 초록빛과 은은한 향을 품은 강된장이 입맛을 후끈하게 달군다. 더없이 잘 어울리는 강된장과 호박잎쌈이다. 그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어느 외식보다 값진 시간임에 고마움을 느낀다. 더운 줄도 모르고 먹다 보니 콧잔등에 올린 한여름이 달콤한 사랑으로 다가온다. 호박잎쌈 하나 만들어 남편에게 건넨다. 달갑지 않은 듯 입안에 넣고 천천히 씹는다. 호박잎쌈이 통명스럽게 한마디 건넨다."아직도 그의 입맛 모르겠니?" 연민의 한순으로 다독인다. 그는 볶음 고추장, 나는 강된장, 식성이 다른 그와 47년 긴 세월 어떻게 살아왔을까. 살아보니 삐걱거리는 입맛을 내게 맞춘다는 일은 헛된 욕심이었다. 그의 입맛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강된장과 호박잎쌈처럼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이제와 남편을 바꿀 수 없지 않은가. 찰떡 궁합이 별건가 그래서 내일은 볶음 고추장을 만들 참이다. 호박잎쌈을 오물거리던 그가 호박꽃처럼 환한 미소를 짓는다. 나도 덩달아 빙긋이 웃는다.



오인순 

ohsoon9651@hanmail.net 

<제주헤럴드> <화요에세이>와 <오여사의 수랏간, 그유혹>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