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한 사람을 위하여
/장사익

보통 수백 명. 수천 명. 심지어 올림픽 행사에서는 수만 명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화려한 조명 아래 환호하는 숱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마음껏 노래하는 순간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마치 현실을 벗어나 환상의 세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어쩌면 그래서 많은 사람이 무대를 꿈꾸며 스타가 되길 열망하는지도 모른다. 나도 가수를 꿈꾸었고, 그 이후 30년 이상 무대에 서며 여러 사람을 만나왔고 다양한 무대를 경험했는데 특히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아 있는 공연이 있다.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한 절실하고 절절한 정성을 다한 공연이었다.
2000년 나고야에서
일본 나고야에서 나를 좋아하던 일본인 이나가끼 마사오가 있었다. 한국 문화를 매우 좋아했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내 노래를 듣고 팬이 되었다.그리고 언젠가는 꼭 일본으로 초청하여 공연을 열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는데 그 뜻을 이루기도 전에 큰 병을 얻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이나가끼의 친구들은 생전에 그의 꿈을 이루어 주자고 뜻을 모아 나를 초청, 나고야에 있는 도쿠죠라는 작은 극장을 빌려 공연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와 예닐곱 명의 연주자 친구들이 일본 나고야에 도착했을 때 그의 병이 너무 위중해져 오늘내일 생사의 갈림길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렵게 마련한 병문안 자리에서 그는 "내일 공연에 도저히 참석하지 못하고 마음으로만 .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하고도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손을 잡고 당신을 생각하며 열심히 노래하겠다고 답했어도 그와 헤어지는 내 발걸음은 마냥 무거웠다.
드디어 2000년 2월 25일 공연일. 무척 추운 날씨였다. 리허설을 마친 뒤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갑자기 출입구 쪽에서 옹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가 딸의 부축을 받으며 그가 2층 공연장까지 올라온 것이었다. 입구에 선 그는 양쪽에서 부축하던 손을 뿌리치고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혼자서 비틀거리며 30~40미터 를 가로질러 무대 앞 객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비장함이 마치 일본의 무사도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절실함, 초인적인 모습에 우리는 숨조차 쉬지 못했다. 리허설을 다 끝낸 상태였으나 내 노래를 듣기 위해 혼신의 힘을 짜내어 여기까지 찾아온 그를 생각했다. '그래. 저 친구 한 사람만을 위해 노래하자. 그의 상태를 생각하면 저녁 본 공연까지 앉아 있기는 힘들 것 같아서 본 공연과 똑같게 1시간 30여 분간 한 곡 한 곡 정성껏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그를 위한 공연이 끝났는데도 그는 돌아가지 않고 꼿꼿이 앉아서 본 공연까지 모두 감상한 뒤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홀로 뚜벅뚜벅 출구로 걸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이나가끼의 날입니다. 길을 터주세요. 이나가끼! 우리 모두 당신을 사랑합니다!" 무대 위에서 나는 목청껏 소리쳤다 공연 다음 날 우리는 귀국했다. 그리고 5일 뒤 내 편지와 포스터를 몸에 두르고 영면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오직 한 사람을 앞에 두고 부른 그날의 비장한 공연이 떠올랐다. 죽기 5일 전. 그는 어떻게 공연장까지 왔을까. 그리고 마지막 예의를 지키기 위해 공연장 입구에서부터 부축을 뿌리치고 죽을힘을 다해 걸어오던 그 모습이 뭉클했다. 그런 사람이라면 천 명, 아니 만 명보다 못할까.
2017년 내동생 斗
나에겐 형 같은 아우 斗가 있었다. 9년 전 하늘로 간 내 아우 斗 는 내게 형 같이 든든한 동생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버팀목이었던 동생이 근 10여 년 큰 병으로 고생하며 당당하고 두텁던 몸이 겨울나무처럼 앙상해져 버렸다. 더는 아무 치료도 할 수 없는 상태로 꽃 피는 봄을 맞이했다. 내 마음이 초조해졌다. 뭔가 아우에게 기쁨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斗야, 꽃 피는 봄이 왔는데 자네 집 마당에서 우리 가족끼리 봄맞이 공연을 하면 어떨까?" 조심스러운 나와 달리 내 노래를 무척 좋아했던 아우는, "좋지. 너무나 좋지. 내 친구들, 친지들, 지인들, 가족 모두 불러서 한 판 놀지."라고 한다. 아우네 집에서 가족음악회를 한다고 하니 우리 음악 친구들과 스태프들이 한걸음에 동참했고 여동생 세 명은 합창을 준비했다. 갑자기 작은 음악회가 판이 커져 400여 명이 참석해 북적였고 내 아우 斗는 이불로 몸을 감
싸고 뒤편 정자에 누워서 공연을 즐겼다 "오늘은 내 아우 斗가 한턱 쏘는 날입니다. 즐겁게 박수 치고 힘내라고 응원 부탁합니다." 동생도 뒤에서 손을 흔들며 즐거워했다. 마지막 곡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을 부를 때는 모두들 뒤돌아서 아우를 보면서 함께 노래를 불렀다. 손 하트를 날리고 손벽도 치면서 눈물은 가슴속에 감추었다. 그렇게 공연을 마치자 "형, 고마워 즐거웠어."라고 좋아하는 동생. "아. 내 선물을 제대로 받은 모양이구나 고맙다. 사랑한다. 아우야." 그리고 한 달 후 내 아우 斗는 행복하게 하늘로 여행을 떠났다.
2022년 음력 정월대보름
"장 선생, 나 강인숙입니다. 다름 아니라 우리 이 선생께서 '나 가거든 장사익이 와서 내 영전에 노래를 불러달라'고 부탁을 하라고 해서 전화했어요." 전화를 끊고 가슴이 먹먹했다. 평소 이어령 선생님을 존경하던 나는 선생님의 병환이 깊어질수록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했는데 이런 전화를 받고 나니 시간이 많지 않았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나는 전화기를 다시 들었다 "선생님 귀천 시에는 당연히 노래 올리겠지만 선생님 생존 시에 노래를 들려드리면 어떨까요? 제가 선생님께 드리는 아주 조그만 선물이며 소망이랍니다."라고 말했다. 선생님이 허락하셨다는 사모님 말씀을 듣고 나는 조그만 카세트와 음악 반주기가 들어있는 CD를 들고 우리 집 홍지동에서 가까운 평창동 선생님 댁으로 달려갔다
그 시각 동산에는 정월 대보름달이 휘영청 떠 올라오고 있었다. 선생님은 평소 기거하시던 3층에서 내려오셔서 2층 소파에 누워 계셨다. 두 손 마주 잡고 깊게 인사를 올렸다.
"선생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야, 내가 살아서 장사익이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게 정말 행복한 일이야."
처음 부른 노래는 부모님과의 인연을 생각하는 <비 내리는 고모령>이었다.두 번째 노래를 준비하던 중 반주가 자동으로 넘어가 <뜨거운 침묵> 을 노래하게 되었다. "모래알같이 많은 사람들, 하필이면 왜 당신이었다..." 선생님이 강인숙 선생님께 드리는 노래가 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 카를 부세의 <산 너머 언덕 너머>를 들으시던 선생님은 이 시를 익히 알고 있다고 하시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셨다.
잠시 쉬는 동안 정월 대보름달을 선물로 드릴 양 "선생님. 오늘이 정월 대보름이에요." 하고 남쪽 창문의 커튼을 올렸으나 둥근 달은 벌써 높이 떠올라 안타깝게도 소파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까? 선생님께서 일간지 기자와 인터뷰하시면서 "내가 장사익이 노래를 나 혼자 들었어."라고 자랑하셨다는 뒷이아기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후 선생님 의 부고를 들었다. 아. 선생님!
노래는 꽃처럼 향기롭고 아름답고 / 나는 벌과 나비가 되어 / 노래의 향기와 꿀을 나른다. 기쁨과 즐거움은 더 충만하게 / 슬픔과 어둠은 가볍고 맑게
나의 노래가 한 사람의 마지막을 행복하게 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나에게 큰 축복이다. 올가을 10월에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공연이 열리면 나는 감사하게도 3천 명의 관객이 모아주는 기를 받아 충만하게 행복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그 기운을 받은 나 또한 나의 노래로 주변에 그 행복을 뿌릴 것이다. 꽃씨가 바람에 날리어 세상을 꽃밭으로 만들 듯이 그렇게 행복의 씨앗을 퍼뜨리고 싶다.